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덴도르프 공세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독일 제국은 이 작전을 통해 1차 세계대전 기준으로 상당한 영토를 얻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.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었으며, 얻은 영토로 인해 전선이 길어져 [[백일 전투|협상국의 공격]]을 방어하기 힘들어졌다. 작전 초기 협상국에 비해 우세했던 서부 전선의 병력은 계속 소모되어 7월에 이르자 독일군 207개 사단 대 연합군 203개 사단으로 비슷해 졌으며, 이는 곧 미국에서 꾸준히 병력이 추가됨에 따라 역전되었다. 독일은 인력이 고갈되어 손실된 병력을 보충 할 수 없었다. 독일 군 사령부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달당 20만명이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달에 보충되는 병력은 7만에서 8만에 불과했으며, 만 18세를 넘어 징집할 수 있는 남자의 수는 고작 1년당 30만명에 불과했다. 특히 상술했듯이 독일군의 손실은 연합군과 달리 정예 병력의 비율이 훨씬 컸다.[* 루덴도르프 공세 당시에는 독일군이 공격측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상대로 더 우월한 교환비를 냈지만, 이는 정예 병력과 고급 사단들을 제물로 바치고 이루어진 결과였다. 이러한 숙련병들의 궤멸에 연합군의 전차 투입 확대가 겹치면서 [[백일 공세]] 당시에는 독일군이 방어측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보다 더 열악한 교환비를 내는 결과로 되돌아온다.]그리고 황당하게도 이렇게 병력이 부족한 와중에도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[[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|드넓은 러시아 땅에 묶여 있었다.]] 연합군들의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어 발생했던 혼란은 [[페르디낭 포슈]]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오르며 해결되었으며, 이후의 작전에서 더 원활한 협력이 이루어졌다. 또한 미국군은 처음으로 독립된 부대로써 전투에 참가했다. 아이러니하게도, 초반의 성공적인 공세는 독일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. 독일군은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적군의 사정도 별 다를 것이 없다면서 병사들을 타이르곤 했지만, 병사들은 점령을 하며 적군의 보급이 훨씬 좋다는 것을 보고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